조건과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관계
친구는 오래 가깝게 사귀어 정이 두터운 관계를 뜻한다고 한다.
그런 사이는 조건과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관계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가깝게 사귀어 정이 두터워진다는 것은 믿음과 신뢰가 있는 것이다.
단순히 이익 관계로 가까워진 관계에는 믿음과 신뢰가 성립되기 어렵다.
그런 관계는 조건과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관계다.
그런데 현대는 이러한 관계도 친구라고 종종 얘기한다.
나에게 손해가 되면 손절하고, 나에게 이익되면 가까이하고.
우리 사회에 흔히 있는 관계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가족, 연인, 친구 등에도 많이 일어난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사회에서 언급하는 수많은 말들은 그 진정한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있고, 어디까지나 자신의 욕심만을 위하는 단어로 변질되어 버린 것 같다.
가족이면 더없이 가까운 사이로 그 누구보다 잘 지내야 하지만, 자신의 이익에 반할 경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연인이라면 서로를 향한 마음이 애틋하고 살가워야 하지만, 자신의 이익에 반할 경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친구라면 신뢰와 믿음으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지만, 자신의 이익에 반할 경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넓게는 사회가, 가깝게는 가정이, 개인의 이기심만을 최우선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만 좋으면 좋다.
이 마음이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못 만들게 한다.
우리가 아니기에 개인의 실익을 최우선시한다.
'우리'라는 인식은 누구 혼자가 가져선 안 된다.
인간관계라면 상호적이어야 하며, 공동체라면 구성원들이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문제는 애석하게도 이러한 풍토가 굉장히 팽배해져 있다.
그래서 착하게 살면 바보고, 정직하게 살면 바보라는 얘기가 나온다.
바보로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나?
정말로 마음이 순수하고 맑아서 누가 뭐라고 하든 순수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정말로 드물다.
이기심에 팽배한 사회는 '우리'의 인식을 불가하게 한다.
이기심에 팽배한 사회는 언제나 자신만의 이익을 최우선시한다.
그런 사회, 그런 관계에선 진정한 의미의 가족, 연인, 친구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