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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직장인의 잡담

약육강식, 생존과 도태, 나 자신을 위한 길

by 열공열공 2022.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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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왕국을 가끔 보곤 한다. 때론, 순수함이 생각나서, 때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재확인하기 위해서.


생태계는 철저히 약육강식이다. 약한 자는 먹이가 되고, 강한 자는 먹이를 취한다.


그리고, 강자는 생존하며, 약자는 도태 된다. 이건, 같은 동족 간의 무리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강한 수컷은 암컷을 차지하고, 약한 수컷은 기를 못 펴고 무리에 들러리로 속해 있거나, 무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철저한 선별, 철저한 선택.


암컷 역시 강한 수컷을 원한다. 자신의 생존과 자기 자손의 생존을 위해. 물론, 강한 수컷에 선택받았다고 해서 거기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강한 수컷은 여러 명의 암컷을 거닌다. 암컷들 사이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고, 여왕의 자리를 차지했어도 언제든지 도태될 수 있고, 자신의 새끼들의 안전 역시 항시로 위협받는다.


과거 왕정 시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중전이 있고, 수많은 후궁이 있다. 중전과 후궁들은 서로 자기 자손을 왕으로 세우려 한다. 그리고 상대의 자손을 어떻게든 쳐 내려고 하거나, 죽이려 한다. 이러한 모습이 동물들의 무리에서 볼 수 있다.


결국, 약육강식과 생존 그리고 도태는 잔혹하고 지나친 생각이 아니라 존재하는 현실이다. 강한 자는 선택의 기회가 많고, 약한 자는 그 기회를 박탈 당한다. 알량한 동정이나 감정에 호소하는 건 어디까지나 강자에게 보내는 구걸일 뿐이다. 그 선택은 강자의 것이지 약자의 것이 아니다.


강자는 약자를 판단한다. 약자가 가치가 있으면 알량한 선심을 베푼다. 구걸한 약자는 그것을 감사히 수용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물론, 약자가 언제나 약자로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약자가 싫으면 자신이 강자가 되면 된다.


와신상담, 절차탁마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자신의 필사적인 노력과 결과물이다. 애당초 약자는 강자보다 출발점이 한참 뒤에 있다. 그것을 따라잡고 강자를 앞지르기 위해선 강자보다 훨씬 큰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절대로 기존의 강자를 누르고 자신이 강자가 될 수 없다.


물론, 사람의 노력은 정말로 진솔한 노력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간계, 이간질, 배신, 갈아타기 등 치졸하고 졸렬한 방법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이 비난받긴 하지만, 이러한 방법을 사용해서 힘을 얻고 강자가 되는 사례가 많다 보니, 종종 사용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강자가 되기 위한 방법은 기존의 강자를 누르는 방법도 있지만 자기보다 약한 집단에 가서 자신이 강자가 되는 방법이 있다. 상대적으로 덜 노력해도 되고, 상대적으로 덜 힘든 방법이다. 흔히 말하는 '용 꼬리가 될 바엔 닭 머리가 되겠다'는 그런 행동이다.


어떤 선택이 나은 결과를 만들지는 모른다. 그건 가 봐야 아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역량, 노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 능력치, 인프라, 기타 등등.


기왕 오른다면 더 높은 곳을 오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과유불급, 자신의 역량을 초과하는 욕심은 반드시 독이 된다.


인과를 논할 때, 나는 그것을 절대치의 결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인'이라도 받게 되는 '과'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쉽게 받을 수 있고, 어렵게 받을 수 있다.


러시아 전쟁 만행의 주범 '푸틴'을 보면, 이자의 '인'은 반인류적이며 공개 처형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짓을 계속해서 자행하고 있지만, 받는 '과'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약하다. 이유는 이 사람이 현재 가지고 있는 힘이 돌아오는 '과'를 완화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권선징악이 있다면 '푸틴'은 벌써 벼락을 맞아도 수십번 맞고, 공개 처형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푸틴'에게 무거운 '과'는 부여되지 않고 있다.


시간이 지나 봐야 안다고?


물론 그럴 수 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럴 수 있지만, 과거 수많은 독재자와 잔혹한 사람들의 말로가 항상 배드 엔딩은 아니라고 알고 있다. 오히려 누가 보면 그저 평범하게 산 사람보다 더 호의호식하며 잘 처먹고 실컷 즐기다 죽은 사람도 태반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일성과 김정일, 우리나라의 부패한 재벌, 부패한 위정자들이다.


그리고 우리 사람을 생각해 보면 거의 매일 같이 자신보다 약한 생명체를 죽이며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통상적인 '인'에 해당하는 '과'를 제대로 받고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심지어 이러한 행위를 미화시키고 정당화 시켜도 거기에 따른 '과'는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 미약하다.


결국, 인과의 '인'과 '과'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커다란 '인'이라고 할지라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과'는 별것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작은 '인'이라고 할지라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과'는 버겁고 힘겨운 것이다.


모든 것은 약육강식, 그리고 생존과 도태.


자신의 용량은 자신이 만들고 감당하는 것이다.


감당 안 되는 욕심에 자신과 세상을 한탄하지 말고 자신의 역량을 기르거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욕심을 가지도록 노력해라.


능력과 용량을 올릴 수 있으면 올리고, 그럴 수 없으면 욕심을 줄여라.


그것이 자신을 위하는 길이다.


세상과 자신을 한탄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건 그저 자신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자학일 뿐이다.


자학하지 마라.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죽는 그날까지 유일하게 언제나 같이 있는 존재는 나 자신뿐이다.


소중한 자신을 자학하지 말고, 진심으로 위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행동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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